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빈 김씨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본관은 [[광산 김씨|광산]]이다. 아버지는 김재청(金在淸)이고, 어머니는 [[평산 신씨]] 신명하의 딸이다. [[1832년]](순조 32년) 8월 27일, 한사루동 사제의 유연당(悠然堂)에서 출생하였다. [[헌종(조선)|헌종]]의 첫 [[조선/역대 왕비|왕비]]인 [[효현왕후]]가 [[1843년]](헌종 9년) 16세에 죽자, 새로운 [[조선/역대 왕비|왕비]]를 뽑기 위한 [[간택]]을 시작했다. 이때 김씨도 참여했는데, [[헌종(조선)|헌종]]은 김씨를 좋아했으나 [[조선/왕실|왕실]] 어른들은 [[효정왕후|홍씨]]가 더 마음에 들었다. 당시 [[결혼|국혼]]은 당사자보다 [[조선/왕실|왕실]] 어른들의 입김과 뜻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었기에, 결국 홍씨가 [[조선/역대 왕비|계비]]([[효정왕후]])로 정해졌다는 '''[[야사(역사)|야사]]'''가 전해진다. 그러나 이 일화는 [[야사(역사)|야사]]가 확실한 것이, 당시의 《[[승정원일기]]》를 보면 초간택에 김재청의 딸은 보이지 않는다. [[간택]]을 위한 처녀 단자에 이름이 없었으니 첫눈에 반했다는 이야기는 거의 [[로맨스 소설]] 급. >'''[[순원왕후|대왕대비전]]'''이 조석형에게 전교하기를, >>"전 정랑 홍재룡(洪在龍)의 딸, 동몽교관(童蒙敎官) 윤규석(尹奎錫)의 딸, 부사과 신태운(申泰運)의 딸, 유학 서기순(徐麒淳)의 딸, 행 부호군 김공현(金公鉉)의 딸, 선공감 봉사 정기승(鄭基承)의 딸, 생원 박흥수(朴興壽)의 딸을 모두 재간택(再揀擇)을 들이고, 그 나머지는 허혼(許婚)하라." >하였다. >---- >- '''《[[승정원일기]]》 헌종 10년([[1844년]], 청 도광(道光) 24년) 4월 22일 (기미) 2/3 기사''' 실제로는 [[효정왕후]]가 [[조선/역대 왕비|새 왕비]]가 된 지 3년 후인 [[1847년]](헌종 13년)에 [[대왕대비]]였던 [[순원왕후]]의 명으로, [[후궁]] [[간택]]을 하게 된다. 이 때 김씨가 [[헌종(조선)|헌종]]의 [[후궁]]으로 최종 낙점, '''경빈(慶嬪)'''으로 책봉되었다. >'''김씨를 경빈으로 책봉하다''' >---- >'''김씨(金氏)'''를 '''[[경빈 김씨|경빈]](慶嬪)'''으로 책봉하였다. >주부(主簿) '''김재청(金在淸)'''의 딸이다. >---- >- '''《[[헌종실록]]》 14권, 헌종 13년([[1847년]], 청 도광(道光) 27년) 10월 20일 (병인) 1번째기사''' [[헌종(조선)|헌종]]은 [[효현왕후]], [[효정왕후]]보다 경빈 김씨를 총애했고, 그녀를 위해 [[창덕궁]]에 [[창덕궁 낙선재|낙선재(樂善齋)]]와 [[창덕궁 석복헌|석복헌(錫福軒)]]을 지었다고 한다. 이는 [[정조(조선)|정조]]와 [[수빈 박씨]]의 처소를 서로 곁에 두어 [[순조]]를 둔 것을 따라한 것으로, 경빈 김씨가 [[조선/왕사|후사]]를 낳기를 바란 뜻이다. 아마도 이 시기의 김씨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었을지도 모른다. 하지만 [[헌종(조선)|헌종]]이 23세의 젊은 나이로 [[죽음|승하]]하고, 김씨는 [[궁궐]]을 떠나야 했다. 약 2년 간의 짧은 신혼을 누린 셈. 김씨는 [[궁궐]]을 떠나 별궁인 [[순화궁]]에서 살게 되었으나 [[조선/왕실|왕실]]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주요 어른으로 예우를 받는다. 경빈 김씨는 시할머니 [[순원왕후]]와 시어머니 [[신정왕후 조씨|신정왕후]]를 잘 모시고, [[헌종(조선)|헌종]]의 [[조선/역대 왕비|왕비]]인 [[효정왕후]]에게도 예를 갖추며 조용히 검소하게 살다가 [[1907년]](광무 11년) 4월 21일, 향년 75세로 [[사망]]했다.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 황제]]는 그녀의 [[죽음]]을 깊이 애도하며 조령(詔令)으로 조문(弔文)을 직접 지었다.[* 고종이 익종의 양자로서 즉위했으므로, 경빈은 서[[형수]] 뻘이다.] >'''경빈 김씨가 졸하다''' >---- >경빈(慶嬪) 김씨(金氏)가 졸(卒)하였다. 이에 대해 조령(詔令)을 내리기를, >>"경빈은 연세가 높아도 아직 정력이 강건하였으므로 병환이 깊긴 해도 내심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는데 문득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. 지난날 극진하게 예우해 주던 은혜를 추념(追念)함에 처창한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? 게다가 올해는 입궁(入宮)한 지 주갑(週甲)이 되는 해이므로 더욱 비감에 잠기게 된다. '''[[순조|순묘(純廟)]]''' 갑신년([[1824년|1824]]) [[화빈 윤씨|화빈(和嬪)]]의 상례(喪禮) 때의 고사(故事)에 따라 모든 일을 거행하고, '''동원부기(東園副器)'''[* [[관(장례)|관]]을 제작할 때 쓰는 목재] 1부(部)를 실어 보내라. 성복일(成服日)에는 봉시(奉侍)를 보내어 치제(致祭)하도록 하고, 제문(祭文)은 직접 지어 내리겠다." >하였다. >---- >- '''《[[고종실록]]》 48권, 고종 44년([[1907년]], 대한 광무(光武) 11년) 6월 1일 (양력) 1번째기사''' 본인은 조용히 살았지만 사실 그녀의 노년기는 [[임오군란]], [[갑신정변]], [[갑오개혁]], [[을미사변]], [[아관파천]], 심지어 [[대한제국|제국 개창]]과 [[을사늑약]]까지 [[근대화|근대]] [[조선]]의 굵직굵직한 사건과 망국의 서막이 함께 열리고 있었다. [[사망]] 한 달 후에는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 황제]]의 강제 퇴위를 비롯하여 [[정미7조약]]이 강제로 체결되었고, 주인 잃은 [[순화궁]] 역시 이리 팔리고 저리 팔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